잠잠히 도살장에 이끌린 어린양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주간을 지나며 우리는 다시금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 십자가는 단순한 형틀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뚜렷하게 새겨진 구속의 상징이며, 우리 죄를 대신 지신 어린양이 걸어가신 침묵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사야 53장 7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말없이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복음의 신비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7)
침묵의 고난, 말이 아닌 피로 말하다 (이사야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라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낯설면서도 경이로운 장면을 그려줍니다. 우리는 억울할 때 말합니다. 억울할수록 더 크게 외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괴로움의 순간에 침묵하셨습니다.
이 침묵은 무력함의 표현이 아니라, 전능한 사랑의 의지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말씀하실 수 있었고, 자신을 변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선택하셨습니다. 말씀하지 않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복하신 것입니다. 침묵은 무기력한 것이 아니라, 가장 큰 힘이 숨겨진 하나님의 언어였습니다.
그분은 말이 아닌 피로 말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린 그 피가 곧 하나님의 음성이 되었습니다. 침묵은 때로 가장 명료한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고, 심판을 향한 사랑의 언어였습니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 순종의 정점 (이사야 53:7)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이라는 표현은 구약의 제사 제도를 배경으로 한 강렬한 상징입니다. 어린양은 자신이 왜 끌려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는 단순한 희생양이 아니라, 구속의 어린양이셨습니다. 의식된 걸음, 의식된 희생이었습니다.
여러분, 도수장은 희생의 끝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끝으로 걸어가셨습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 강요당해서가 아니라 기꺼이 걸어가셨습니다. 그 걸음은 순종의 정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완전히 내어드린 그 모습은, 우리에게 순종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 신앙의 자리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계산하며 순종합니까? 조건을 붙이고, 상황을 따지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수장의 끝에서도 계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사랑으로, 오직 아버지의 뜻으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이 어린양의 순종 앞에 우리는 다시 고개를 숙입니다.
털 깎는 자 앞의 침묵, 존엄의 미학 (이사야 53:7)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라는 비유는 단순히 침묵의 반복이 아닙니다. 이는 더 깊은 존엄의 표현입니다. 털을 깎인다는 것은 모든 체면과 보호막이 벗겨지는 순간입니다. 무방비한 상태, 가장 낮아진 자리. 그런데도 그 양은 저항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털 깎이는 그 순간에도, 침묵하셨습니다.
그 침묵은 수치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위엄입니다. 그는 수치스러움 속에서 거룩함을 지키셨고, 모욕 속에서도 하나님의 존귀를 손상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존엄의 미학’입니다. 세상은 모욕당하면 되받아치고, 수치를 주면 복수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모든 수치 앞에 잠잠하셨습니다. 그분의 잠잠함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분노를 넘는 하나님의 위엄을 보게 됩니다.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침묵 속의 복음 (이사야 53:7)
이사야는 이 문장을 한 번 더 반복합니다.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반복은 강조입니다. 그리고 반복은 곧 외침입니다. 이 침묵은 복음의 외침입니다. 그분이 침묵하셨기에, 우리는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변명하지 않으셨기에,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침묵의 사건이었지만, 동시에 복음의 가장 크고 또렷한 외침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침묵 안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듣습니다. 그 침묵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그 침묵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확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주간은 그 침묵을 다시 듣는 시간입니다. 이 한 주간 동안 세상의 소음을 멈추고, 예수님의 침묵 앞에 머무르십시오. 말씀하지 않으심으로, 그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침묵이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울립니다.
마무리 묵상
오늘 우리는 이사야 53장 7절을 통해, 예수님의 침묵 속에 담긴 구속의 깊이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곤욕을 당하고도 입을 열지 않으신 주님, 도수장으로 끌려가면서도 한마디 항의조차 하지 않으신 주님, 수치 앞에서도 존엄을 지키신 주님, 그분의 침묵은 복음이 되었고, 그 복음은 오늘 우리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고난주간은 이 복음의 침묵을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장을 듣고, 예수님의 순종을 배우며, 성령의 위로를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그 침묵 앞에 나아오십시오. 변명도, 해명도, 자기 연민도 내려놓고, 잠잠히 서십시오. 그리고 들으십시오. 말이 없는 그 고요 속에 울려 퍼지는 십자가의 사랑을. 침묵으로 우리를 살리신 그 주님의 길을 따라, 우리도 말보다 삶으로 복음을 증언하는 자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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